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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은 인도와의 전쟁 패배와 안보위협 때문에 핵을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이 동맹국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로 인한 불신으로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개발과 배치에 성공하였다. 파키스탄은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후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였고, 1974년 인도의 핵실험 성공에 자극받아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였다. 1983년 핵무기 cold test를 하였고, 1998년 5월에는 동시에 6번의 핵실험을 실시,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종교적 이유로 분리된 파키스탄과 인도는 상대에 대한 적대적 정서가 있다. 인도는 종교적 이유로 분리된 파키스탄이 역내 안보 불안을 가중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파키스탄 역시 인도가 자국 안보에 가장 큰 불안 요인이라고 간주하고 있다.파키스탄이 처음 핵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인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싸워 패한 뒤부터이다. 인도와의 전쟁 패배로 재래식 전력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맹국이라 믿었던 미국의 포기행위에 심각한 안보불안을 경험하였다. 파키스탄은 미국과 1954년에 군사동맹을 맺은 관계였지만 미국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안보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주도한 이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였다. 1958년 집권한 군부 정권인 아유브 칸(Ayub Khan)정권 하에서 핵에너지 담당 부서의 책임자를 맡았던 부토는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주장해 왔다. 1965년 카슈미르에서 인도에 패한 파키스탄은 자국의 안보강화를 위해 핵무기 개발을 착수하였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까지 파키스탄은 이렇다 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때 파키스탄은 당시 중국이 국경문제로 인도와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인도를 견제한다는 공돔목표로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은 파키스탄의 중요한 재래식 무기 공급원이 되었다.
1972년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 전쟁(동파키스탄 분리 독립 전쟁)에서 방글라데시를 지원한 인도군과 맞붙어 또다시 패했다. 그 결과로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이 분리 독립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에 따른 상실감과 동맹국 미국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게 되었다.(이전에 파키스탄은 인도를 동서에서 압박하고 있는 형태였음. 동쪽이 동파키스탄으로 지금의 방글라데시이고, 서쪽이 지금의 파키스탄이다.) 이에 일부 군부 지도자들은 획기적인 조치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안보위협을 억제할 수 있는 핵무기 보유에 대한 의지는 증가했다.
부토는 1972년 1월 24일, 파키스탄 펀자브 주 물탄 (Multan)에서 열린 비밀 과학자회의에서 “파키스탄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풀을 뜯어먹는 상황이 오더라도 반드시 원자폭탄을 보유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이 공식적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3년 부토는 대통령이 되었고 파키스탄에서 ‘핵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Abdul Qadeer Khan) 박사가 부토대통령의 뜻에 따라 핵 개발에 앞장섰다. 칸 박사는 네덜란드가 대주주로 있는 ‘유랭코(Urenco)’라는 원자력 관련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다 회사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을 훔쳐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네덜란드 당국은 그를 스파이 혐의로 기소했지만 감옥에 가두지는 못했다. 70년대 후반에 칸 박사는 부토 대통령의 후원을 받아 독일과 영국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과 장비를 수입하고 중국에서 원폭 설계를 들여오는 등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부토 대통령은 1974년 2월 라호르(Lahore)에서 개최된 ‘이슬람회의기구(OIC: 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에서 핵 개발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부토는 핵 개발 드라이브를 ‘이슬람을 위한 핵무기(Islamic Bomb)’라고 지칭했다.
1974년 5월, 인도가 라자스탄(Rajasthan) 사막에서 첫 핵 실험을 단행한 데 충격을 받은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76년 ‘프로젝트 706’을 출범시키고 압둘 카디르 칸을 그 연구 책임자로 앉힘으로써 핵 개발의 기반을 충실히 쌓았다.
그러나 부토가 주도한 핵 개발은 미국의 저지를 받았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1976년 5월 미 의회에서 사이밍턴 수정안(Symington Amendment)51)을 통과시켰으며, 8월에는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를 찾아와 프랑스에서 핵재처리 시설을 들여오려는 계획을 취소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시설은 핵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키신저는 부토 대통령에게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부토 대통령은 1977년 7월 육군 참모총장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Zia ul-Haq)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부토 대통령은 실각당한 뒤 1979년 4월 교수형을 당했다. 부토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은 핵 개발 때문에 축출되었다고 주장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지아 울 하크는 핵문제에 관한 한 겉으로는 미국에 협력했다. 그러나 그도 부토 대통령의 핵 개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칸의 핵 개발을 계속 후원했다. 파키스탄의 비밀 핵 개발 의혹이 계속되자 미국은 1977년 카터 대통령의 남아시아 방문 때 의도적으로 파키스탄만 제외했다. 파키스탄과 미국은 더 이상 동맹국이 아니었다. 이어 1979년 11월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 대사관이 반미 시위대의 습격을 받자 미국은 모든 원조를 중단했다. 하지만 1979년 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국의 파키스탄 정책은 는 변화를 맞게 되었다. 미 의회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할 때까지 사이밍턴 수정안을 유보하기로 결정한 뒤, 파키스탄을 통한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반군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하는 기지를 인접국인 파키스탄에 세웠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파키스탄에 경제·군사적 지원을 하고 파키스탄과의 안보 협력이 확대되면 파키스탄의 핵무기 보유 동기는 자연스럽게 감소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안보를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이 기간 동안에도 핵 개발을 계속했다. 파키스탄 정부가 “핵 개발은 평화적 목적에 국한되어 있다”라고 거짓말을 계속하는 동안 칸 박사는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은 유태인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둘러댔다. 파키스탄의 핵 개발 의혹이 계속되자 1985년 미 의회는 대통령이 매년 파키스탄이 핵폭발 장치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확인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대통령이 이를 확인하지 못할 경우에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 원조를 금지하도록 하는 프레슬러 수정안(pressler Amendment)을 통과시켰지만 실제 발동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이후에도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방조했다. 85년 10월에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이를 알아차리고 정부에 보고했다. 미국 법률은 5대 핵 보유국 이외에 핵무기를 생산하는 나라에게는 모든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의회에서 논쟁이 붙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86년 10월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원조를 계속하라고 승인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이 철군하기 3년 전인 1987년 파키스탄 출신의 캐나다인 아르샤드 페르베즈(Arshad Pervez)가 미국 회사로부터 원심분리기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25톤의 고강도 철강과 핵폭탄의 중성 자원으로 사용될 수 있는 베릴륨(beryllium)을 구매하려다가 적발되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미국은 파키스탄을 제재하지 않았다. 1990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 미국은 전략적 가치가 감소한 파키스탄에 대해 프레슬러 수정안에 근거한 제재를 단행했다.
동맹국으로서의 가치가 평가 절하된 파키스탄이 느낀 미국에 대한 배신감과 인도로부터의 안보 위협은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980년대 후반부터 파키스탄의 핵 개발에 불안해진 인도 는 파키스탄을 그냥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1987년 건국 이후 가장 큰 규모로 군사 훈련을 벌였다. 40만명을 동원해서 러 달 동안 훈련을 실시하여 파키스탄에 대한 무력 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가 안보에 위협을 느끼고 핵 개발에 속도를 붙였다.
파키스탄은 1983년 핵무기 cold test를 하였다. 그리고 1998년 인도가 핵실험을 한 직후인 1998년 5월 28일과 30일 짧은 기간동안 파키스탄은 총 5 차례의 핵 실험을 강행함으로써 핵보유국 대열에 올랐다.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개발할 때 미국은 제재를 가하였지만 중국은 핵심 기술을 포함한 여러 가지 지원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중국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지원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로 다음 증거가 언급되고 있다. 2004년 리비아가 핵개발을 포기하면서 자국이 입수한 핵무기 조립 관련 기술 자료를 IAEA에 제출하였는데 그 자료의 상당 부분이 중국어로 씌어져 있었고, 그 내용도 1980년대 초 중국 전문가의 강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문서들을 담고 있던 두개의 봉투 표면에 선명히 새겨진 글씨는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양복점 상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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