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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때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 까지 이어진다. 1960년 2월 핵실험을 성공하고, 1971년 핵탄두를 탑재한 SLBM인 M1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과학자들도 맨해튼 계획에 참가했으나, 영국과 미국 과학자들과는 달리 프랑스 과학자들은 3류 취급(미국 1류, 영국 2류)을 받으며 중수로 건설과 플루토늄 분리 작업에만 부분적으로 참가하는데에 그쳤다. 다만 프랑스 과학자들도 핵폭탄의 중요성을 알고 어떻게든 자국에 이 사실을 알리려 했다. 특히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맨해튼 계획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프랑스 과학자들은 어떻게서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미국은 이걸 막으려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해방된 프랑스로 돌아가는데 성공하였고 드골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드골의 측근에게 말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원자폭탄의 존재에 대해 알리게 된다. 얼마 뒤 그 과학자들과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드골은 그들에게 "아주 잘 알아들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전후 프랑스 대통령에 선출된 샤를 드골은 전쟁이 끝난지 몇 달도 안 되었던 1945년 10월, 핵폭탄의 개발을 비밀리에 명하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하였다. 드골은 곧 물러났지만,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핵개발 의지를 알고 있었던 미국·영국·캐나다는 우라늄공급통제조약을 맺어 프랑스를 방해하려 했지만, 다행히 프랑스 국내에서 대규모의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는 행운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독자핵개발 의지를 더욱 굳혀준 사건이 1956년에 있었는데, 제2차 중동전쟁이 그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작전은 이스라엘의 주도 아래 잘 진행되었으나, 소련이 개입해 이집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핵 공격을 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미국까지 소련에 동조하자 프랑스와 영국은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영국은 그 당시 원폭과 수폭의 개발이 거의 끝나가 양산체제에 돌입한 상태였지만, 프랑스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핵 폭탄 개발의 필요성이 프랑스에 팽배하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당시 서독에게 핵무기 공동 개발을 제의하기에 이르고, 서독이 프랑스에게 비밀리에 핵 기술과 돈을 지원(서독은 비자금 20억 마르크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다고 함)한다면 핵개발후 프랑스의 핵 전력에 대한 서독의 지분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한 계약이 성사되려는 찰나, 알제리 전쟁을 계기로 집권한 드골 장군이 그 계획을 취소시킴으로서 프랑스의 단독프로젝트로 남게 된다.

계약이 취소되자 당시 서독의 국방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힘은 군사력이며, 군사력은 오늘날 곧 핵력이다. 핵무장 없는 서독은 다른 동맹국의 군대를 위한 취사병이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판날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이후 서독에는 미국의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이 대량배치되면서 완벽하게 NATO에 종속되었다.

한편 NATO를 미국-프랑스-영국의 3강 체제로 만들자는 드골의 제안마저 프랑스가 핵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드 골은 그 어떤 수와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독자적인 핵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드 골은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핵개발을 주장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명백한 점은 우리 프랑스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프랑스가 공개적으로 핵개발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UN, 미국, 소련 등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프랑스의 핵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지만, 핵개발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나라를 막을 수 없다는 국제정치판의 법칙은 이번에도 맞아 떨어졌다.

결국 프랑스는 1960년 2월 알제리(당시 프랑스 영토)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작전 암호명은 푸른 날쥐(Gerboise Bleue.)

핵실험 직후 드 골은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국력에 비추어 보아 소련이나 미국에 맞먹는 핵전력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비례억지전략이라는 핵전략을 채택했다. 간략하게 말하면 일단 어떤 국가가 프랑스와의 핵전쟁을 시작한다면(프랑스가 핵공격을 받는다면), 프랑스는 상대국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핵을 쏟아부어 상대국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최종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높기에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전략이었으나, 이 전략을 세운 당사자인 프랑스나 제3차 세계 대전 발발시 주 전장이 될 서독으로서는, 핵무기가 일단 사용되기 시작하면 인류문명이 멸망할 전면적 핵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미국-소련 양 초강대국에 강요함으로서 이들이 유럽전선을 무대로 핵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제안한 유연반응전략을 채택하면서 프랑스의 핵전략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맥나라마도 유연반응전략을 버리고 비례억지전략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유연반응전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유럽전선에서 소련이 전술핵을 한 발 사용하면 미국도 한 발 사용한다. 소련이 두 발 사용하면 미국도 두 발 사용한다. 소련 서기장도 미국 대통령도 사람이기에 죽고 싶지 않으므로, 이러한 핵전략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직접적으로 겨누고 있는 장거리 전략핵의 사용가능성을 줄여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 허나 동시에, 이는 미국-소련 수뇌부가 전술핵사용을 결단하는데 따르는 부담감을 크게 낮춰주는 부작용이 있다. "핵을 사용하면 미국과 소련도 끝장이야. 그러니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핵은 최대한 자제해야지"가 아니라 "핵무기 사용을 '안전한' 유럽전선에 국한시킬 수 있다면, 전술핵 몇 발 쯤은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나?"로 판단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는 유럽국가인 프랑스 입장에서는 용납불가였다. 결국 드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미군 장성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NATO통합군에서 탈퇴하고 주둔 미군까지 쫓아내면서 사실상의 독자노선을 취하게 된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유럽에서 걷어내고, 위대한 프랑스의 휘광 아래에 전유럽을 보듬으려는 드 골의 야심과도 일맥상통했다.

 

"NATO는 프랑스의 독립과 국익에 배치된다. 우리가 NATO 회원국이 된 것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소련이 공격해 올 것으로 믿지 않는다. … NATO는 이제 더 이상 동맹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속체제이다. 프랑스가 독립성을 회복한 이후에 가서는 프랑스가 서방국가들의 어떤 동맹에 참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책임져주는 미국과 같은 상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이 팽팽한 갈등은 민주당 정권과 드 골 정권이 모두 끝난 1969년에 끝난다. 정권을 잡은 공화당(미국) 닉슨 정권은 결국 프랑스에게 기술지원을 해주기에 이른다. 이미 프랑스가 독자적인 핵무장에 성공한 이상, 차라리 도와주고 외교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서로 다른 목표를 맞출 수 있는 여러 개의 핵탄두를 탑재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이 이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맥마흔 법에 의해 기술의 해외이전은 금지되어 있었고, 결국 미국은 Negative Guidance라는 편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기술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러면 미국 기술자는 그게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만 짚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미국측 기술자가 범법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네바다 핵실험장에 프랑스가 자신들의 측정장치를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핵실험 회수를 줄여 개발비를 절약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며 아예 핵탄두를 들고 와서 직접 핵실험을 하라고까지 제안했으나, 무슨 생각인지 이건 또 거절했다. 대신 미국은 과학자들을 파견해 프랑스의 무루루아 섬 핵실험장의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에 여러가지 지원을 했지만, 끝까지 전략핵잠수함에 대한 기술은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해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략핵잠은 해군의 보물이니까요. 결국 프랑스는 이 분야에서도 외부 지원 없이 자체개발에 성공한다!

당시 프랑스의 한 관계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핵무기 관계자들은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이 프랑스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발전시켰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게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영국-캐나다 3국의 우라늄공급통제협정으로 핵개발을 저지당할 뻔 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프랑스는 미국에게 지원을 받은 이후로도 1970년대 독자적인 핵개발을 추진하던 한국에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판매하려 시도하는 등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에 대해 불쾌한 입장을 표명하곤 했다.

그 외에 이스라엘의 핵개발도 프랑스의 핵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국내외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대신, 프랑스는 미국이 유럽땅에 자신들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지지했고, NATO군에서는 탈퇴했으나 유사시 프랑스군이 NATO 산하에 들어가는 것을 비밀리에 허락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의 100% 순수 프랑스 기술로 만들어진 force de frappe(핵타격군)은 강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MIRV개발과 몇몇 부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엄연히 자체기술로 핵실험에 성공했고 지상/수중배치 핵탄두와 그 발사체까지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면 영국은 SLBM체계 개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결국 미국의 폴라리스,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구입해서 운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미국은 프랑스에게 굴복을 강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 프랑스의 핵개발예산은 한 때 국방예산의 25%에 이르렀을 정도이며 여당이건 야당이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 목소리로 조국의 핵무장을 외쳤다. 물론 드골주의 성향이 드골 사임 후에도 강했다는 점이 한몫 하긴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프랑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프랑스는 미국을 위해 자국의 핵전략도 고쳐주었으며, 그외에도 미군의 유럽배치를 허락하는 등 많은걸 양보했다. 냉전은 끝났고,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정식으로 NATO에 복귀했고 이 비밀을 마침내 발견한 언론들에게 짧은 성명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으나, 이는 곧 묻혔다. 하지만 미국 내의 불쾌한 여론이 반영되었는지 미국판 고질라는 90년대 프랑스의 핵 실험 때문에 도마뱀이 변이되어 생기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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