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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핵폭탄 개발은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부터 시작되어 1952년에 첫 핵폭탄 실험을 성공하고 1957년에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38년 독일의 물리학자 Otto Hahn과 Lise-Meitner가 핵분열현상 발견에 성공함으로써 독일이 원자탄 개발에 앞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지도자들은 원자탄 개발을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어떻게 해서든 독일보다 먼저 원자탄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1940년 4월 보수당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내각 산하에 『모드 위원회(Maud Committee)』를 설치하여 원자탄 개발의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은밀히 지시하였다. 과학자들로 구성된 모드 위원회는 연구결과 보고를 통해 원자탄 개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욱이 “핵폭탄이 개발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그와 같은 결정적인 가능성을 가진 무기를 보유하지 않는다면 어떤 국가도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핵폭탄개발 노력은 헛된 일이 아닐 것”이라고 함으로써 핵무기가 국가안보와 국제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효과적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모드 위원회의 보고는 영국의 초기 핵개발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41년 8월 핵폭탄 제조 가능성을 확신한 모드 위원회의 보고가 워싱턴에 전해진 후 미국은 영국에게 핵폭탄 공동개발·생산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핵폭탄 개발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능가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합작할 경우 영국의 주도권을 상실할 우려가 있었고 핵기밀 유지가 곤란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미국의 공동개발·생산 제의를 거부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미국의 핵개발연구사업이 90%의 공정을 보임으로써 영국보다 앞서게 되자, 미국으로서는 영국과의 합작연구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영국이 오히려 소련에게 핵기밀을 누설할 것을 우려하여 이번에는 미국이 영국에게 핵정보 제공을 제한하였다.
그 후 처칠 수상은 영·미간의 불신과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핵폭탄 공동생산에 필요한 사항을 미국에 제의하였으며, 결국 1943년 8월 19일 처칠 수상과 루즈벨트 대통령은 퀘벡에서 비밀 핵협력협정을 통해 원자탄 공동연구·생산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핵폭탄의 정치적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미국은 유럽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에게 이 기술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2류 강대국' 따위와 권력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라는 심플한 논조였다.

특히 영국은 더욱 더 큰 배신감을 느꼈는데,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때 핵무기 제조 프로젝트인 트윈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twin tube alloy project)를 미국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이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가 좀 더 크게 발전된 것이 맨해튼 프로젝트였다. 또한 1944년, 미국은 영국과 하이드 파크 협정이라는 비밀협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영국에게 핵무기 관련 기술 지원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1946년 미국은 맥마흔 법안[1]을 통과시켜 핵물질 및 핵기술의 국외 이전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면서 영국에게 엿을 먹였다.

영국의 핵개발 의욕이 고조된 상황에서 미국 의회가 핵무기를 독점하기 위해 1946년 8월 핵무기와 관련된 핵물질과 핵정보·기술의 다른 나라 이전을 금지하는 맥마흔 법을 전격적으로 통과시킴으로써 영국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2차대전 중 처칠 수상과 루즈벨트 대통령 간에 비밀리에 체결된 ‘전시 및 전후의 핵협력 협정’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핵협력 단절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조치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애틀리 정부는 수상, 재무상, 외상, 내무상, 국방상 등을 중심으로 내각 내에 ‘국방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심사숙고 끝에 애틀리 정부는 1947년 1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혹은 믿음으로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1) 대영제국이 와해되고 경제력이 회복되지 못하더라도 핵무기 보유는 영국이 과거 대영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누리던 강대국으로서의 역할과 영향력을 보장할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다.

 2) 영연방에 배치되어 있는 영국의 통상전력만으로는 서유럽과 영국 본토에 대한 소련의 세력팽창과 공격 가능성을 줄이고 아직도 남아있는 영연방을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핵무기의 개발이 절실히 필요하다.

 3) 영국 지도자들은 세계안보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과 1, 2차 세계대전 때 서유럽 방어에 실패한 미국과의 경험을 상기하여 전후에 미국이 또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함으로써 영국이 불확실한 국제환경에 혼자 내버려질 가능성을 두려워했는데, 독자적 핵무기개발은 그러한 위험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미국의 고립주의 회귀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원조도 이끌어낼 수 있는 ‘자위 수단’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틀리 정부가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강력히 추진한 배경에는 맥마흔법 통과로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정치적 고려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1952년 핵실험에 성공한 이후 애틀리 수상은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결정하게 된 배경과 영국인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우리는 미국인들과 협력을 할 수 없었다. 그 어리석은 맥마흔법은 우리가 그들과 협력하는 것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은 어른이고 우리는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인식은 1946년 10월에 개최된 『국방 소위원회』가 엄청난 비용 때문에 영국이 우라늄 농축시설의 건설을 막 포기하려던 찰나에 뒤늦게 도착한 베빈(Bevin) 외상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것(핵무기)을 가져야만 한다. 나로서는 개의치 않지만, 나는 방금 내가 당한 것처럼 이 나라의 다른 어떤 외상이 미 국무장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다. · · · 아무리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우리는 지금 당장 이걸(핵무기) 가져야 한다."

이처럼 애틀리 정부는 핵무기를 강대국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으로 생각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으로부터 상처 입은 영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결정했던 것이다.


영국은 소련의 세력팽창을 저지하고 실추된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핵무기 개발에 달렸다고 판단하고, 2차대전 직후부터 더욱 본격적인 핵개발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이미 모드 위원회의 보고 및 미국과의 전시 핵협력을 통해 핵개발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약 40명의 영국 과학자들이 2차대전 중 미국의 원자탄 제조계획인 맨하탄 계획(Manhattan Project)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우라늄 농축 및 원자탄 제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이미 습득했고, 미국도 긴밀한 전시 핵협력을 전후까지 연장할 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영국은 사실상 배타적인 핵국가 클럽에 참가할 수 있는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핵개발 측면에서 볼 때 1946년은 영국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시기에 영국은 원자력법 통과, 원자력 이용에 관한 연구·실험을 수행하는 시설인 Harwell과 핵분열물질을 생산하기 위한 조직 설립 결정, Risley 원자력 연구소 설립, Springfields 우라늄 처리시설 설립 및 Amersham 방사화학센터 설립 등을 통해 적극적인 핵개발기반 조성에 착수하였다.

1946년, 영국 정부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존 콕크로프트가 요청하여 설립한 원자력 연구 기관(Atomic Energy Research Establishment, AERE)에서 핵무기 연구를 하기 시작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을 뒷구멍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소련의 스파이인 클라우스 푹스도 참가해서 결과적으로 영국의 핵개발 상황을 소련에 유출하게 되지만, 푹스가 영국에 유출해줬던 팻맨과 폭축렌즈 설계도, 핵실험 데이터, 우라늄 생산법은 영국의 핵무장에 상당한 도움이 됐었다. 1947년 군사용 원자로에서 뽑은 핵연료를 재처리하기 위해 셀라필드 원자력 단지를 건설하였다. 그후 1946년부터 윌리엄 페니 경의 감독하에 AWE를 운영하게 된다. 1948년 영국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시인하고, 1952년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에 수소폭탄의 실험에 성공하면서 영국은 성공적으로 핵클럽에 가입, 소련(참고로 소련은 각각 1949년과 1953년보다는 늦긴 했지만 영국도 세번째 핵 보유국이 되면서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외교를 할 위치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호주에게서 핵무기 원료 물질들을 대량 확보했으며, 호주 정부로 부터 광활한 면적의 핵실험지와 핵실험 재료[3]들을 빌릴 수 있었다. 대표적인 핵실험 장소로는 마랄링가, 에뮤 필드, 몰든 섬, 크리스마스 섬, 몬테벨로 섬 등이 있다. 호주 땅에서 핵실험을 진행하다가 1958년 영국과 미국이 상호 핵무기 개발 조약을 맺고 미국 땅에서 핵실험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 후 이 관계는 매우 돈독해져,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독자 개발하지 않고 미국의 탄도미사일을 운용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미국의 폴라리스 미사일을 구입하였고 현재는 폴라리스의 개량판인 트라이던트 탄도 미사일을 도입하여 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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